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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레닌/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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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혁명]]과 [[소련]]의 건설 == ||<table align=center>[[파일:external/gatsbysmonologue.files.wordpress.com/lenin1.jpg|w=580]] Ленин — жил, 레닌은 살았으며, Ленин — жив, 레닌은 살아있으며, Ленин — будет жить! 레닌은 살아있으리라!||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은 이른바 '이중권력체제'라고 부르는 모순 상태에 빠졌다고 해석된다. 차르를 중심으로 하는 구체제가 모든 힘을 상실했으나 새로운 정부 또한 확고한 힘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임시정부와 현지 소비에트가 서로가 용인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와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의 주도로 이루어지지 않은 황제 폐위 및 2월 혁명의 결과에 당황한 나머지 서로 눈치를 보며 주도적인 활동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임시정부의 힘은 거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 주변 일부밖에 미치지 않았다. 8월, 케렌스키와 갈등을 빚던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하게 된다. 이를 저지할 군사력을 모으던 케렌스키 정권은 페트로그라드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민중들의 자치적 평의회 즉, '소비에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각 소비에트의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 휘하의 병력을 소멸[* [[전신]] 및 [[철도]] 체계를 장악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거짓된 통신을 보내어 병력을 분산시킨다든가, 병사들이 타고 있던 [[열차]]의 운행을 고의로 멈추거나 전혀 엉뚱한 지역으로 열차를 보내버림으로써 말 그대로 병력의 응집 자체를 '소멸'시켜버린 것!]시키는데 도와주게 된다.[* 다만 여기에 볼셰비키가 무슨 주도적인 영향을 한 것처럼 서술하는데 소비에트는 정당은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단칼에 거부했다.] [[1917년]] 10월, 이러한 와중에 레닌은 마침내 케렌스키 정부가 모든 힘을 상실했음을 느끼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에 즉각적인 혁명의 개시를 촉구했다.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노동자 대중을 동원하기가 가장 유리했던 볼셰비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지도자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로 거의 무혈로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10월 혁명]]이다. 1917년 11월 8일에 제2차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리고 레닌은 즉시 자신을 지원해준 독일과 강화 회담을 시작했고, 1918년에 치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그 대가로 [[핀란드 대공국]], [[발트 3국]],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러시아령 폴란드]], [[베사라비아]]([[몰도바]]), [[우크라이나]]를 포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마자 볼셰비키는 이 조약을 폐기했지만 떨어져 나간 지역들은 우크라이나를 제외하면 소련에서 이탈했다, 한편으로 볼셰비키는 예고한 대로 1917년 11월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볼셰비키에 대한 노동자와 군대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당 우파가 과반을 차지하자[* 당시 러시아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볼셰비키는 대도시의 노동자, 전선의 군대에서 과반의 지지를 받았으나 토지개혁을 기반으로 농민의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당을 수적으로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연대하여, 사회혁명당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볼셰비키의 계획은 집단농장화.] [[1918년]] '''한 차례의 회의만에 제헌의회를 폐지'''해 버리고[* 이때의 논리가 '선거 결과가 소비에트를 통해 나타난 민중의 실제 의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소비에트는 사업장별로 대표자를 뽑는데, 여기에서는 볼셰비키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의회에 비해 인민의 의사를 보다 정확히,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통로'라 여겼기에 제헌의회를 해산한 것인데, 이 시점에야 소비에트에는 다른 좌파인 사회혁명당 좌파와 멘셰비키가 참여했다지만 정작 볼셰비키가 이들을 전부 불법화해버리면서 이후 볼셰비키 혼자 참여하는 소비에트 선거는 실질적으로 상부에 영향을 끼칠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KGB]]의 전신이 되는 [[체카]]를 설치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을 놓게 된다. 이 과정에서 레닌은 마흐노의 아나키스트 세력과 나탄손, 스피리도노바의 사회혁명당 좌파와 연대했다. 테러 전문가였던 사회혁명당 좌파는 체카의 핵심을 이뤘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는 브레스트 리토프츠크조약에 반대해 레닌을 암살하려 시도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진압되었으며,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이 토사구팽하며 1919년에는 야당이 전부 금지된다. 야당도 여당도 아닌 동지 멘셰비키들은 꽤나 오래 버텼지만, 야당에 우호적인 원로 레프 카메네프의 반대와 노동계급의 전체연대(동행인 중심의 통일전선)를 주장하는 트로츠키의 소소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1920년대 내내 지역 소비에트에서 당선되는 멘셰비키들을 모조리 축출한다. 레닌이 작성한 코민테른 21개조 요구에서도 개량주의(사회민주주의)와 중도주의(독일 독립사민당의 혁명-개량 중간위치)를 전부 배격하라는 주장이 들어갔으며, 좌파공산주의세력은 얼마간 버텼으나 크론시타트 수병반란 이후 대부분이 축출되고 일부는 트로츠키, 일부는 부하린을 지지하다 소멸한다. 비록 혁명은 성공했지만 단순히 페트로그라드와 대도시 중심의 [[쿠데타]]에 불과했고, 좌파 사회혁명당과 일부 아나키스트를 제외한 정치세력은 그들이 얼마 못 갈 것이라 여겼다. 게다가 레닌이 독일과의 불평등 휴전 조약을 맺자 볼셰비키의 적군과 반 볼셰비키의 백군이 서로 싸우는 [[러시아 내전]]이 터진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 등 당대 모든 주요 열강 세력과 [[독일 제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군사 강국들이 직접 원정군을 파견한 것은 물론, 각지에서 백군 세력이 봉기하여 신생 소련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 상태였다. 이를 계기로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가 수장이 된 소련의 [[붉은 군대]](赤軍. 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가 최초로 결성되었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하지만 결국 주요 공업지대와 인구 밀집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볼셰비키가 끝끝내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21년]] 내전은 종료되었다. 이 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고 볼셰비키의 권력은 확고부동하게 되었으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9천만명의 인구중 1천5백만명이 죽어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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